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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 지도자대회] 독립운동 기여…교회 재건 운동과 교육에도 혼신의 노력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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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7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고(故) 이원근 장로에게 수여된 대통령표창을 손자인 이영헌 집사가 대신 받은 후 박근혜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지난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7주년 3·1절 기념식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부인 고(故) 이원근 장로에게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1919년 3월 황해도 장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돼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3·1절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 고 이원근 장로는

황해도에서 독립만세운동 참여

체포돼 징역 6월 받고 옥고 치러

옥중서도 비밀리 예배시간 가져





이 장로는 1889년 10월 27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면 칠남리 중7동에서 탄생했으며 독립운동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교회 재건 운동에도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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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은 고 이원근 장로. 교회 재건에도 헌신했다. [사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그는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 송천 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당시 황해도의 유일한 고등보통학교인 해주고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선교사의 추천과 후원으로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으나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꿈을 포기하고 귀향해 교육에 힘썼다. 동네 유지들의 후원으로 일신학교를 세우고 교장이자 교사로서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때 황해도 장연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고문수사와 거듭되는 회유에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 헌병보로 있던 고교 동창이 해주 검찰청에 가서 조사를 받을 때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곧 석방될 것이라고 일러줬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검사의 심문을 받을 때도, 재판을 받을 때도 조선의 독립을 진정으로 원한다고 대답했다. 이 장로는 결국 검사의 구형대로 6개월 형이 확정돼 해주형무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출옥했다. 수감 기간 동안 추위·굶주림·독방감금·구타 등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이어졌지만 이 장로는 언제나 희생을 자원하고 일석점호 후에는 비밀리에 예배시간을 가졌다.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이 장로는 평양시에서 새 출발을 시도했다.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지꾸니 쇼뎅(천국상회) 싱거 미싱 외판원으로 시작해 미싱 조립공장을 신설 운영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고, 평양시 미싱상 조합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처럼 사업을 전개하면서도 이 장로는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 한 서원기도를 잊지 않고 교회의 일과 전도사업에 더 열심히 헌신했다.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평양서문박교회의 장로로 임직돼 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봉사했다. 틈이 있을 때마다 개인전도와 농촌교회의 집회 인도에도 나섰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고 평양시민 소개령을 내리자 이 장로는 사업을 정리한 후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이주해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장연군 건국준비위원회의 건국준비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순택면 건국위원장으로 추대돼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북한 정권을 장악하자 1948년 6월 월남해 서울 용산구에 남영동 교회를 세우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1949년 여름 전라남도 광주에 선교본부를 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타요한(Mr. J. E. Talmage) 목사로부터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 장로는 제주읍을 거쳐 남원면 남원리에 교회를 세우고 축호전도를 시작했다. 표선교회도 재건 했다. 남원교회에서 2년간 목회를 하며 기도처(현 위미교회)를 설립하고 남원고등공민학교(현 남원중)를 인수해 지역 복음화와 교육에 일조했다. 6.25전쟁이 발발해 1951년 1·4후퇴로 많은 교역자들이 제주도로 피난을 오자 남원면 남원교회와 표선면 표선교회를 교역자에게 인계하고 서울로 상경해 상도동과 대방동에서 기도생활과 축호전도·개인전도에 전력했다. 가까운 순복음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1973년 3월 12일 소천했다.



이영훈 목사는 조부에 대한 포상에 감사를 표하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목사는 “한국 교회가 구한말 개화기에 정치·교육·의료·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역사교과서에서 서술 비중이 다른 종교에 비해 현저히 낮다”면서 “기독교가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역사교과서는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수 객원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