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임에도 유대교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놓여 있다. 왼쪽부터 어윤경 성균관장, 박남수 교령, 자승 총무원장, 김희중 대주교, 이영훈 한기총 대표회장.
가르멜 수녀원, 알람브라 궁전 등
가톨릭과 이슬람 상생 현장 순례
자승, 데레사 성인 유해에 입맞춰
“간디와 킹 목사처럼 비폭력 중요
서로의 다름 인정하면 평화 올 것”
자승 총무원장이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 성인 유해(손가락) 앞에 서 있다.
가톨릭과 이슬람이 전쟁을 겪고 공존을 모색했던 스페인 남부의 역사적 현장에 국내 종교계 수장들이 모였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이하 종지협)는 지난달 24~29일 ‘이웃종교 성지순례’의 일환으로 스페인을 찾았다. 종지협 의장인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비롯해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한기총 대표회장 이영훈(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 목사, 천도교 박남수 교령, 유교 어윤경 성균관장 등 5대 종교 수장이 참가했다. 원불교 한은숙 교정원장과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 회장은 내부 사정으로 불참했다.
종교계 수장들은 25일(현지시간) 수도 마드리드에서 안토니오 마리아 로우코 바렐라(79) 추기경을 만났다. 추기경은 지난해까지 마드리드 교구장을 역임했다. 집무실에서 일행을 맞은 그는 “50년 전만 해도 전 세계는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다”며 “가톨릭도 타종교에 폐쇄적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야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스페인은 인구의 90%가 가톨릭 신자다. 다수 종교인 가톨릭이 주도해 소수 종교와의 소통과 배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자승 스님은 “한국에는 50개 종교와 1000개 가까운 종파가 있다. 세계의 종교 백화점이다. 그럼에도 갈등 없이 화합하고 상생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답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한국의 여러 종교가 잘 지내는 건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안토니오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것도 항구적인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사태가 터졌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평화를 멈출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수장들은 이후 남부의 그라나다로 향했다. 중세 때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유럽을 공략하던 길목이다. 지금도 곳곳에 가톨릭의 유적과 이슬람의 유적이 혼재해있다. 특히 13~14세기 이슬람 왕조가 세운 알람브라 궁전은 그리스도교의 땅이 된 뒤에도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궁전의 성벽을 걷던 천도교 박남수 교령은 “종교간 소통의 핵심은 결국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천도교 교조 최제우의 말)이다. 인간의 근본은 같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하나라는 걸 알 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스페인에는 가톨릭 영성사의 거목인 아빌라의 데레사(1515~82) 수녀가 설립한 맨발의 가르멜 수도원이 있다. 시골마을 론다에 도착해 가르멜 수녀원을 찾았다. 종신서원을 하고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봉쇄수녀원이다. 수장들이 문을 두드렸다. 굳게 닫혔던 나무 대문이 열렸다. 김희중 대주교가 취지를 설명하자 수녀 한 명이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 유해(손가락)를 모셔왔다. 자승 스님은 그 유해에 입을 맞추었다. 종교간 이해와 소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풍경이었다.
론다에서 일행이 들른 커피숍에선 즉석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 마련한 설법 자리)’이 열렸다. 이영훈 목사는 “인도에서 간디 기념관에 들른 적이 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인도를 영국의 지배로부터 구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도 300일 넘는 비폭력 행진으로 미국 사회의 흑백 차별을 극복했다.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어윤경 성균관장은 “이번 순례를 통해 종교간에 아무런 벽이 없는 걸 실감한다. 앞으로도 평화롭게 잘 살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이어 자승 스님이 조계사에 들어온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거취에 대해 수장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수장들 모두 “정부의 강제적인 공권력 투입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김희중 대주교는 “종교기관에 들어온 사람을 내친다면 그에 동조하는 모든 사람을 내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이런 상태가 계속 갈 수는 없다. 정부에서 너무 서두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정부는 좀 더 인내하고, 해당 종교기관에선 ‘자비’를 통해 감화를 주고 당당하게 나가게끔 종교적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마드리드·그라나다·론다(스페인)=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