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 “선진국 되는 비결이 뭐냐고요? 부자가 과감히 내놓아야 합니다”(3)2014-09-05
이영훈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국제개발 NGO인 굿피플이 2013년 12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하얏트호텔에서 ‘필리핀 태풍피해 구호물품 전달식’을 갖고 85억 원 상당의 구호물품을 전달했다(왼쪽사진). 7월 15일 해남 땅끝마을에 자리잡은 그룹홈인 ‘천사의 집’을 방문한 이영훈 목사. |
보수적인 개신교계에서 진보 목소리 높여와
미혼모들이 늘어나면서 버려진 아이들 문제가 심각하군요!
“최근에는 다문화가정 아이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어요. 1년이면 2만5천 쌍의 다문화가정이 새로 생겨납니다.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필리핀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2만5천 쌍 중에 8천 쌍이 이혼을 합니다. 말이 안 통하고 문화가 안 맞는데다가 시골에 와서 힘든 농사일을 하고 일부는 가정폭력에 노출되다 보니 가출을 하고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얼굴색이 다르고 말도 안 통하니까 어디를 가도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죠. 그런 아이들이 지금 그룹 홈으로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20∼30년 후의 미래를 볼 때 우리나라에는 저출산 문제가 아주 심각해질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사회에 버려진 아이가 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죠. 이런 사태에 대해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내부적으로 출산장려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녀 많이 낳기’ 캠페인과 함께 출산장려금을 지원하고 있어요. 아이 한 명 낳을 때 현금 50만 원, 둘 낳을 때 100만 원, 셋째부터는 200만 원씩 지원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 나오는 분이 많이 생기긴 했습니다.”(웃음)
이영훈 목사는 지난 7년 동안 ‘나눔’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교회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이나 ‘사랑’을 입으로 말하기보다는 구체적 현실에 뿌리박고 현장에서 ‘실천’하는 데 있다. 교회 예산의 3분의 1을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쓰겠다고 선언해 그 약속을 지켰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재단법인화해 교회를 사유화할 수 있는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앴다.
2011년에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의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맡기도 한 그는 우리 시대의 현안과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목회자로 꼽힌다. 얼마 전에는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 재벌들이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초대 담임목사였던 조용기(79) 원로목사와 달리 보수적인 개신교계 내에서도 진보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목사님이 요즘 고민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안은 무엇입니까?
“저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 자생 좌파가 많이 생겨날 것으로 봅니다. 왜 그러는가? 지금 극빈층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남미 쪽에서 해방신학이 생겨났는데, 잘사는 사람은 아주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너무 못사는 빈부격차가 심해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지금 그 모델로 가고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의 빈부 격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홈리스 대책위원회장을 맡고 있는데, 집에서 거주하지 않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요. 일례로 서울에 ‘캡슐방’이라는 데가 있습니다. 5천 원 주고 자는 ‘쪽방’에 갈 돈도 없어서 2천~3천 원 주고 몸만 들어가서 자는 방이 캡슐방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장기 투숙자는 2천 원에 잘 수 있는데 몸만 들어가서 자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쓰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분들에 대한 보살핌이나 일자리 같은 대책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 서민들의 아픔 운운하며 이용만 할 뿐이지 근본 대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시중은행장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하는 말씀이 ‘돈은 많이 쌓여 있는데 빌려주고 싶어도 빌려줄 데가 마땅치 않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서민들은 돈이 없어 힘든데 돈이 왜 쌓여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기업들이 돈을 엄청나게 쌓아놓고도 쓰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사회의 빈부격차 해소에 재벌이 앞장서야”
급격한 부의 편중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너무 많은 돈이 기업과 재벌에만 몰려 있습니다. 미국의 대 부호인 워렌 버핏은 재벌들을 만날 때마다 재산을 절반씩 사회에 내놓게 합니다. 어디를 가던지 재벌들을 불러서 같이 식사를 한번 하겠다고 하면 100만 달러, 200만 달러를 내도록 해서 밥을 먹으면서 재산을 절반씩 내놓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도 이에 동참했지요. 워렌 버핏은 전 재산이 50조 원인데 99%를 스스로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런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는 안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대통령이 약속한 반값등록금 문제 해결도 제가 보기에 해결방법이 간단합니다. 대통령이 재벌 회장들을 만나서 ‘나라를 위해 당신들이 희생을 하세요. 1년에 2조 원씩만 내 놓으면 정부 반값등록금 공약이 해결됩니다. 그러니 서로 윈-윈 합시다. 세금 혜택을 드릴 테니까 1년에 2조 원만 내놓으세요’ 그러면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겠어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비결이 뭐냐? 기득권층이, 재벌들이 과감하게 자기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 재벌이 갖고 있는 것을 절반 정도만 내놓으면 우리나라 복지 문제는 금방 해결됩니다.
진짜 부자는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게 쓰는 사람입니다. 가진 사람이 내놓으면 이 사회가 굉장히 아름다워집니다. 그렇다고 제가 진보니 골수진보니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성경에 나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치권이 재벌의 친구가 되고, 권력의 신하가 되는 시대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생적 좌파들의 생성을 막는 방법도 거기에 달려 있다고 보시는군요?
“극빈층이 희망을 잃으면 좌파적 사고에 빠질 수 밖에 없거든요. 가진 게 분노뿐이니 프로테스탄트(항거)하는 겁니다. 그 분노를 이용하는 세력이 또 정치권입니다. 여권은 여권대로 ‘종북 좌파’ 운운하면서 또 이용하고요. 제가 실제로 겪어보니까 극빈층 가운데 좌파가 아닌 사람도 많습니다. 너무 가진 것이 없을 뿐입니다. 빈부격차 해결은 간단해요. 재벌들이 내놓으면 됩니다.
조건 없이 1년에 1조∼2조 원 내놓으면 학생들 등록금도 해결되고, 극빈층 문제도 해결됩니다. 우리 교회는 재벌만큼 가진 건 없지만 있는 돈의 3분의 1을 내놓아서 그런 부분에서 앞장서고 있잖아요.(웃음) 우리가 앞장서서 하면 주변에서 그걸 보고 따라오는 분들이 또 생겨나질 않겠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큰 희망을 줄 것 같습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것은 그분이 기독교 정신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교황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잖아요. 진정한 섬김은 자기희생이 바탕이 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돕는 섬김 활동은 종파 간 장벽을 뛰어넘어야 됩니다.
나라의 통일문제, 서민을 섬기는 문제, 사회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법 등 공의(公義)로운 일에는 종교나 종파를 떠나서, 사상을 떠나서 다같이 해야 합니다. 진정한 진보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프로테스탄트 쪽만 편드는 것이 진보가 아닙니다.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노숙자들 밥도 퍼주고 그들이 살 수 있는 대책도 마련해주는 것이 진보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기본을 지키자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리와 의무가 같이 가는 것이 민주사회의 법칙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기 권리는 얘기해도 의무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민주사회는 법치주의입니다. 스스로 법을 지키고 나서 법대로 해달라고 요구해야 되는데 자신들이 먼저 법을 안 지키면서 남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각 종파가 머리를 맞대고 모여서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자기희생이 바탕 돼야
이영훈 목사는 쟁쟁한 장로교단의 목회자들 앞에서 “우리의 삶은 첫째도 예수, 둘째도 예수로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기 업적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목회자다.
언제 어디서나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강조하는 그의 이런 태도와 가치관은 그가 자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한다. 그는 4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의 조부인 고 이원근 장로는 서귀포의 남원과 표선에 교회를 세우고 남원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하는 등 목회활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한 애국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인 고 이경선 장로는 1978~79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장로회장을 지냈다고 한다.
목사님은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집안이 평양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왔던 120여 년 전부터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원근 할아버님은 3·1운동 때 앞장섰다가 평양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신 대쪽 같은 분인데, 평양의 서문밖교회의 장로로 계셨어요. 할아버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분이 나중에 월남(越南)해서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강신명 목사입니다. 1948년 6월에 할아버님이 황해도 해주에서 통통배 어선을 하나 빌려서 뱃전에는 생선을 얹고, 배 밑창에 우리 여덟 가족을 태우고 38선을 넘었습니다. 할아버님이 시집간 고모만 북에 남겨뒀는데 그때 남았던 가족과 친척들의 후손 50명이 현재도 북한에 살고 있습니다.
이 할아버님이 1950년 초에 제주도에 내려가십니다. 미국 남장로 교회 선교본부의 요청을 받고 4·3폭동으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시지요. 서귀포의 남원에 가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가 지금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세운 남원고등공민학교가 지금 남원중학교가 되었고요.”
그러면 목사님은 순복음교회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6·25전쟁 후에 서울에 정착한 후 1964년초 서대문로터리 근처로 이사왔는데 집 앞에 바로 순복음교회가 있었어요. 할아버님이 새벽기도를 나가시면서 어떤 신앙체험이 있으셨던가봐요. 그래서 그해에 저희 집안은 할아버님의 결단으로 순복음교회로 옮기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장로교에 뿌리를 둔 우리 집안을 강력한 성령운동을 하는 순복음교회로 파송시켜주셔서 말씀운동과 성령운동을 접목해서 한국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라고 봐야죠.
제가 4남1녀 중 둘째인데, 저희 집안은 장로교인이 많고, 제 동생은 감리교 목사입니다. 할머니 쪽으로는 성결교 목사가 계시고요. 저만 순복음교회인 이유가 순복음교회에 와서 특별한 체험을 했거든요. 매일같이 제가 집에서 성경말씀을 들었잖아요. 기독교 신앙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과 바탕이 있는데다가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13세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성령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회심(回心)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 삶의 여정에 있어서 하나님 외에는 다른 데를 바라보지 않은 것 같아요. 48년 전에 그 신앙체험을 한 이후로는 한번도 ‘세속적’인 것들에 빠져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제 인생은 재미있는 얘기가 없어요. 신앙의 길보다 옆길로 갔다는 얘길 해야 재미있는데 저는 통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요”(웃음)
그는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이자 당회장 목사다. 당회장은 장로들이 모인 당회의 책임자를 말한다. 그는 15개 대교구 아래 9632개의 구역이 그물처럼 촘촘한 조직을 이루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241명의 목사와 169명의 전도사, 1200명의 장로와 함께 등록신자 48만 명의 세계 최대 교회를 7년째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전부터 평소 후덕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교회 안팎으로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열정적인 신학자이면서도 합리적인데다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해 교회 장로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특히 그가 조용기 목사의 후계자로 제2대 담임목사로 선출되는 과정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 편의 드라마였다는 후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신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저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미국 LA 나성순복음교회에 있었습니다. 미국에 갈 때 저는 벌써 50대였기 때문에 여의도본성전을 목회한다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안 해봤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조용기 목사의 후계자로 40대 목회자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당시 조용기 목사님 후계자가 누가 될지 교회 안팎에서 관심이 아주 컸기 때문에 민주적 절차를 통해 후계자를 세우기로 결정돼서 모두 7명이 추천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7명의 추천 리스트에 맨 마지막으로 올라간 겁니다. 미국에 있던 저는 그 리스트에 올라간 것도 몰랐지요. 당시에 저희 교회 당회를 대표하는 교회 운영위원들, 그러니까 150명의 장로가 1차 투표를 해서 3명을 뽑았어요. 그런데 제가 최다 득표자가 됐습니다. 그 3명을 놓고 장로님 900명이 다시 2차 투표를 했는데, 또 제가 최다 득표했습니다.
2차 투표 전에 조용기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답니다. ‘나는 3명 누구도 지지하지 않겠다. 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제자를 뽑아달라.’ 그래서 최다 득표한 제가 선발됐습니다. 그 후에 제가 1년 반 동안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담임목사 서리로 있다가 성도들을 대상으로 전체 투표를 했어요. 그러니까 3차 투표이지요. 그 3차투표를 통해 제가 최종 확정돼서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됐습니다. 민주적 투표절차에 따라 선출된 것이죠.”